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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onciled

화해  花解

이대형  _  Hzone 큐레이터 / 갤러리압생트 디렉터 ,2011

2003년 처음 만난 한원석은 경계성 성격장애, 대인기피증을 가진 사람이었다. 수틀리면 버럭 질러대는 고함소리는 귀에 거슬렸고, 안되는 것도 될 수 있다는 고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들었다. 그러다가도 혹 길에서 껌 파는 할머니라도 만나면 꼬옥 돈을 쥐어 준다. 그것도 천진한 얼굴을 하며 “할머니 오래오래 많이 파세요”. 좀 전까지만 해도 에스프레소 사먹을 돈이 없다 투덜대던 사람이 어디서 만원짜리 선심이 나온 것인지. 비상금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치지만 그의 언어와 행동의 진폭은 보통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크다.  그래서 당황스럽고, 그래서 이해하는데 한참이 걸렸다.

 

그에게 있어 사회가 만들어 놓은 해야될 것과 해선 안되는 것에 대한 경계선은 중요치 않아 보인다. 화가가 되고 싶어 건축판에 뛰어 들더니 진짜 건축가가 되었고, 음악이 좋아 소리를 쫒더니 꽤 괜찮은 스피커도 만들어 냈다. 한 동안 베이징 798에선 대안공간도 운영했었고 거기서 패스티벌도 기획했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행동과 가고 싶은 길을 가는게 중요하지 사람들의 시선따윈 무시해도 좋다는 식이다. 괜히 고집피우다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오해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쌓이게 될 오해 역시 신경쓰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에 대한 “실수”도 많았다. 필자 역시 비슷한 이유로 한동안 그를 멀리하고 보지 않았다. 

 

2010년 가을 한원석 작가를 다시 만났다. 작품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04년 죄수복을 입고 담배꽁초 수십만개를 쌓아 올린 “악의 꽃”으로 출발했을 때만해도, 다시는 버려진 오브제(사람들은 이를 “쓰레기”라고 부른다.)를 예술품으로 바꾸려는 무모한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막대한 시간과 노동을 투자해야 할 수 있는 전시였기 때문이다. 예상은 빗나갔다.  2006년 1374개의 버려진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모아 첨성대 작품 “환생”을 만들더니, 2년 뒤 2008년에는 3088개의 스피커를 모아 선덕대왕신종을 재현한 “형연”을 선보였다. 사회로부터 버려진 것들을 모아 예술작품으로 환생시키겠다는 최초의 약속을 지켜온 것이다. 

 

말 그대로 “꽃을 풀어내다”란 뜻에서 출발한 전시 “화해”는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속 마음을 털어 놓는 공간이다. 이를 위해 40여일간 1만 6000여개의 스피커를 전시장 벽면에 붙혀 나갔다. 처음에는 큐레이터(필자)와의 작은 화해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내 세상과의 화해, 환경과의 화해, 자연과의 화해, 그리고 작가 자신과의 화해로 확장되었다.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1만 6000개의 검은색 스피커에 둘러 쌓인 소리의 방으로 걸어 들어가자 희미한 울림이 점점 커진다. 그러나 소리의 출처를 찾기 쉽지 않다. 벽면의 수많은 스피커들 중 어느것 하나 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 어두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소리와 침묵하고 있는 스피커란 아이러니한 상황이 말을 건네고 싶지만 머뭇거리고 침묵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첨성대, 성덕대왕 신종 등 이전까지 한국의 문화적 뿌리를 상징하는 형상을 만들었다면, 이번에는 형상 자체를 지워 버렸다. 그래서 소리에 좀 더 몰입 할 수 있도록 했다. 대신 인공적 소리의 원리와 자연의 소리의 원리 사이에서 접점을 발견하는데 집중했다. 원리는 비교적 간단했다. 일반적으로 스피커가 특정 방향으로 소리를 전하는 지향성이라면, 그가 만들어 내는 옻칠된 지관 스피커는 인간의 목소리처럼 소리가 사방으로 퍼진다. 무지향성이다. 1만 6000개의 스피커 중 달랑 1개를 떼어와 전시장 중앙에 위치한 둥그런 지관 울림통에 설치했을 뿐인데 효과는 일 당 백이다. 작은 스피커 하나로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쓰레기와 예술, 인간과 자연, 문명과 환경, 전면과 후면, 빛과 그림자 등 한원석 작품의 큰 특징은 이원론적 구조 사이의 경계 위에 있다.

그리고 이를 건축가답게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림이 그려진 전면만 강조하는 회화에 반기를 들고, 냄새나는 담배꽁초 작업으로 전면과 이면이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고(작가에게 있어 냄새나는 이면이 진실이고 화려한 꽃이 그려진 전면이 허상이다), 폐 헤드라이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LED 빛을 통해 첨성대의 역사적, 공간적 한계상황을 극복하며 미래의 빛을 만들어 냈고,  폐 스피커 작업을 통해 가시적인 영역과 비가시적인 영역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이렇듯 냄새, 빛, 소리 등을 고집스럽게 수집해온 한원석의 일관된 목소리는 욕망이다. 그는 그것을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욕망으로 나눈다. 가족에 대한 사랑,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개인의 욕망으로, 사회적 욕망은 출세욕, 권력욕, 물욕 등으로 요약한다. 그리고 점차 괴물처럼 거대해지고 있는 사회적 욕망과 점차 사라져 가는 개인의 욕망 사이의 불균형을 회복할 처방제를 “쓰레기” 더미에서 찾는다. 인간의 쾌락과 사회적 편의를 위한 욕망에 의해 태어났지만, 그 기능을 다하고 버려져야만 하는 “쓰레기”야 말로 최적의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냄새, 빛, 소리 모두 생명의 상징이기에 버려진 오브제가 쉽게 탈맥락화하되어 새로운 의미와 생명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쓰레기를 작품으로” 바꿀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이 만들어 낸 편집증적인 수집 보다 놀라운 것은 그가 기꺼이 스스로를 “죄인”, “회개자”로 명명하며 죄수복을 입고 작업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일시적이면 퍼포먼스라고 말할텐데, 벌써 10년째다. 언어로 진심을 표현할 줄 모르는 이 괴팍한 아티스트가 세상과 화해하는 방법 역시 꽤나 유별나다. 그래서 힘들 사람들보다 그래서 바뀔 세상에 대한 가치가 더 크다고 믿는 한원석이다.     

 

소리를 조각하다'

최태만 _ 미술평론가, 2011

카메라 옵스큐라, 소리를 조각하는 방

 

어두운 방은 비어있다. 따라서 그 공간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이다. 그러나 비어있는 방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검게 칠한 어두운 방의 네 벽을 무수하게 많은 스피커들로 빼곡하게 채워놓아 마치 거대한 음향실을 연상케 하는 실내공간 가운데 세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검은색의 단일 유니트를 반복, 집적해 놓았다는 점에서 이 중성적 공간은 미니멀 스페이스라고 할 수 있다. 이 무균질의 실험실과도 같은 방으로 들어서면 동공이 확대되고 사물을 지각하기 전까지 잠시 암흑의 무중력공간으로 들어선 듯한 기이하고 낯선 체험을 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 방으로 들어선 사람이 블랙홀의 미궁 속으로 빠지지 않도록 최소한의 배려를 해 놓았기 때문에 암흑 속에 유폐된 느낌을 가지는 것은 순간에 불과하다. 가운데 세워진 세 개의 기둥 중 가운데 기둥에서 아주 조도가 낮은 빛이 희미하게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윽고 어디에선가 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도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둥으로 다가서면 표면에 바른 기름이 채 건조하지 않아 번들거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옻칠을 한 세 기둥은 실제로는 지관(紙管)이다. 세 개의 종이파이프 중 가운데 것을 보면 아랫부분 끝을 뿔처럼 모아주고 그 위의 관은 수평으로 자른 형태를 지니고 있다. 빛은 이 잘린 부위에서 나오고 있으므로 어둠 속에서 보면 흡사 촛불 위에 같은 직경의 파이프를 나란히 세워놓은 구조처럼 보인다. 즉 수직으로 설치된 두 개의 관과 그 사이에 스피커와 반사체로 이루어진 파이프까지 모두 4개의 종이관이 세 기둥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어두운 실내 속으로 흐르는 소리는 작가가 직접 설계한 특별한 무지향성 스피커 시스템이 내장된 가운데 기둥으로부터 발산되고 있다. 이 스피커는 반복 재생되는 소리를 앞쪽뿐만 아니라 모든 방향으로 방출시킴으로써 음의 지향성을 제거하여 모든 방향에서 최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이것이 내가 경험한 한원석의 <화해>란 소리조각 작업에 대한 기술(記述)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그의 작업에서 소리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이전에도 <소리 숲(Sound Forest)>이란 제목으로 유사한 작업을 발표한 바 있다. 많은 종이파이프를 마치 숲처럼 세우고 그 사이사이에 스피커를 내장한 파이프를 설치한 <소리 숲>은 제목 그대로 나무줄기들로 빼곡한 숲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예전 작품에서는 스피커의 벽을 세우지 않았으나 <화해>에서는 네 벽을 모두 스피커로 채우는 대신 세 개의 파이프 기둥만 설치하였다. 그래서 앞의 작품이 소리가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시각적으로 건축구조를 떠올리게 만드는 공간설치라고 한다면 <화해>에서 소리가 더욱 중요한 요소이자 이 작업을 관류하는 주제로 부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작업에서 그의 관심이 형태를 만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조각하는 것으로 집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화해>가 미니멀한 구조로 이루어진 것도 형태가 없는 파장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다.

두 번째, 그는 왜 이 작업의 이름을 화해(花解)라고 붙였는가 하는 점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화해라면 당연히 분쟁이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서로 가지고 있던 나쁜 감정을 풀어 없애는 화해(和解)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괄호 속에 ‘꽃을 해석한다’는 의미의 한자를 표기하고, 영어제목은 갈등의 해소를 의미하는 ‘reconciled’로 달아놓았기 때문에 제목에서 이미 이중의미 또는 수사(修辭)를 동원해 작품을 경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작업의 의미에 대해 다원적으로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결국 드러난 의미는 ‘꽃’이지만 원의미는 화해(和解)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과의 화해 또는 무엇으로부터의 화해인가? 이것을 해명하기 위해 그의 의식(意識) 속에 자리하고 있는 불화(不和)의 원인에 대해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것을 위해 어쩔 수없이 그의 신변에 대한 약간의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자기와의 화해

 

몇 차례의 인터뷰를 하는 동안 한원석은 자신이 ‘경계성 성격장애’로 어려운 시기를 거쳤다는 사실을 토로했다. 나에게는 생소한 질병이기에 자료를 찾아보니 ‘감정조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데서 오는 정신적 질환’이며, 증상으로는 분노, 우울증, 불안감과 같은 심한 감정기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믿어지지 않는다. 대화할 때도 나보다 한 옥타브 높은 음성으로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밝히고, 자기신념이 강하며, 자신감에 차있는데 경계성 성격장애라니 말이다. 물론 이제는 과거지사가 되었지만 그가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독립적으로 생활하며 스스로 삶의 주인이어야만 했던 그가 불행을 극복하고 촉망받는 건축가로, 정열적인 예술가로 거듭나기 위해 기울여야 했던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그는 자립심이 아주 강한 인격체임에 분명하다. 과거에 어떤 질환을 앓았던 현실감각도 매우 뛰어나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영국에서 환경디자인을 공부할 때든, 그곳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동경대학 건축과에서 박사과정을 다니던 때든 그는 스스로 생계문제를 해결했다. 미술가가 되기 위해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고, 건축설계로 벌어들인 수입으로 최소한의 생활비만 조달하고 나머지는 작업비용으로 대부분 지출했다니 그는 필경 평범한 존재는 아니다. 그런 그가 세상을 향해, 자신의 진정성을 의심하던 사람들을 향해 화해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의 속내까지 속속들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그는 누구 못지않게 세상으로 향한 따뜻한 눈을 지닌 인간이라고 믿는다. 어려운 성장기를 보냈기 때문에 세상으로 향한 분노, 자기만 소외받고 있다는 억울함을 지닐 법도 한데 그는 친절하고 상냥하며 예의바를 뿐만 아니라 상생(相生)에 대한 남다른 열정도 가지고 있다.

그의 작품을 보면 재료가 모두 버려진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용도를 다한 무가치한 사물이 마지막으로 가야할 곳은 재활용센터이거나 쓰레기하치장이다. 이 버려진 혹은 버려질 사물을 수집하여 작품을 제작하는 그의 행위는 따라서 재생(recycling) 혹은 환생(rebirth)의 시도일 뿐만 아니라 죽어버린 것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화해>를 구성하는 16,000개의 스피커도 구식 텔레비전의 부속품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사용가치가 없어 폐기될 것을 수집한 것이다. 해체해 다른 제품의 부품으로 사용할 수도 없는 물건을 수집하여 한 달 이상 정성을 다해 벽면에 부착하는 그의 작업태도는 인내와 집중을 요구하는 단순노동의 극치를 보여준다. 스피커를 연결하여 벽을 쌓는 행위야말로 버려질 사물에 바치는 존경이자 한때 버림받았다는 결핍의 감정으로 방황했던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가 화해하고 싶어 했던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독한 작업이 그에게 관용에 대해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세상과도 화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담배꽁초로부터 환생에 이르기까지

 

2006년경 나는 베이징의 중국미술관에서 버려진 담배꽁초를 모아 만든 한원석의 작품을 처음으로 보았다. 중국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리시엔팅(栗憲庭)이 기획한 이 전시에는 100여명의 대표적인 중국 현대미술가들이 참가하였는데 한국작가로는 유일하게 한원석이 초대작가로 선정된 것이었다. 중국현대미술전에 초대받은 유일한 한국작가였다는 사실도 큰 의미를 지닌 것이지만, 중국작가와 공동으로 제작한 이지러진 지구본을 나로서는 재료나 내용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2003년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담배꽁초로 제작한 작품을 발표한 바 있다. 전시제목도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시집을 떠올리게 만드는 ‘악의 꽃’이었다. 수줍은 듯 꽃잎을 열고 있는 꽃을 클로즈업한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의 작품을 차용한 것으로부터 자화상에 이르기까지 이때 그가 발표한 작품은 모두 흡연자의 쾌락을 위해 스스로 몸을 불태우고 마침내 비참하게 버려진 꽁초들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담배는 쾌락과 유해(有害)란 이중적 속성을 지닌 기호품이다. 버려진 꽁초는 이 두 속성의 잉여물이자 인간만이 탐닉하다 폐기한 쓰레기이다. 자신이 피다버린 것은 물론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꽁초를 수집해 화면을 구성하면서 그는 스스로를 ‘범죄자’ 취급했다. 하루에 스무 개비씩 십 년간 담배를 피웠으니 개수로 따지자면 73,000개에 이르는 담배를 불사르면서 자신의 신체를 학대함은 물론 환경을 오염시켰다는 논리이다. 작업을 위해 하루에 2,340개의 버려진 꽁초를 한 달간 주우면서 그는 ‘회개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이 논리에는 흡연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에 대한 죄의식과 고해, 나아가 욕망의 충족을 위해 환경을 파괴하는 인간에 대한 복잡한 심리가 깔려있다. 담배꽁초를 줍는다고 해서 갑자기 회개자가 되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복잡한 심리의 자기보상에는 어울리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지저분하고 무가치한 쓰레기, 혐연론자들의 머리 속에는 온갖 화학물질을 내뿜는 불량품의 최후로 비쳐질 담배꽁초를 모아 아름다운 꽃을 그리는 그의 행위가 도발적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그의 담배꽁초 그림은 한마디로 역설적이다.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운 꽃은 실제로 추악한 냄새를 풍기는 담배꽁초에 불과하다. 고귀하고 우아한 겉모습 이면에 똬리를 틀고 욕망의 찌꺼기에 대한 통렬하고 자학적인 풍자, 그것은 제동장치가 파열된 채 질주하고 있는 욕망의 기차라고 할 수 있는 현대소비사회가 도달할 대단원에 대한 경고이지 않을까. 광고가 발산하는 화려함 뒤에 잠복하고 있는 소비욕망이 걸어놓은 최면에 이끌리다보면 자아를 상실하게 된다. 이처럼 그의 작품이 내뿜고 있는 화려함 속으로 빨려들 때 결국 만나는 것은 욕망이 폐기해버린 잔해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우리의 정신을 강타하는 도덕적 경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한 때 베이징 따산즈(大山子)의 798예술구에서 이음이란 비영리 갤러리를 운영했다. 여기에도 사연이 있지만 그는 한때 갤러리가 있던 건물의 벽을 모두 담배꽁초로 채우고 불을 지르는 퍼포먼스를 기획하기도 했다. 물론 이 계획이 성사되었을 경우 그는 건조물방화범으로 체포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실험적이지만 무모한 퍼포먼스를 실행하지 못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겠지만 이것을 통해 그가 상상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해 온갖 지혜와 방법을 동원하는 현대미술의 반항아가 되기를 꿈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십만 개의 담배꽁초를 수집해 지금까지 다른 작가가 하지 않은 작품을 제작하겠다는 발상에서 드러나듯 자신이 부당하게 버림받고 있다는 박탈감이 그로 하여금 버려진 사물에 대한 애착을 증폭시켰음에 분명하다. 만약 이 박탈감이 분노와 혐오의 감정으로 분출하였다면 그의 작품이 불러일으킬 센세이션이 엄청났을 것이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부터 ‘생존의 법칙’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세상과의 불화가 자신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폐기된 사물을 수집해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대안을 선택했다. 2006년에 청계천에서 발표한 <환생(還生)>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는 1374개의 버려진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조립하여 첨성대를 만들었다. 청계천 광통교에 설치된 이 작품을 보았을 때만 하더라도 솔직히 나는 실망했다. 하필이면 왜 첨성대인가. 작품 앞에서 백주대낮에 함께 포도주를 마시며 작품에 대해 대화할 때 그는 작품의 구조와 작업방식을 상세하게 설명했지만 수긍도, 납득도 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건축을 전공했으므로 구조야 잘 설계했을 터이지만 그래서 이 작품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라고 가시 돋아난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해가 지고 작품에 조명이 들어오자 제법 그럴 듯했지만 21세기의 도심 속에 복원된 첨성대에 대해서는 여전히 용납할 수 없었다. 2008부산비엔날레 국제조각프로젝트에서 그는 3,088개의 스피커로 구성된 <형연(泂然)>이란 작품을 부산 센텀시티에 있는 APEC나루공원에 설치했다. 그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의 형태를 차용한 비슷한 유형의 작품을 과천 신국립과학관에도 영구설치했다. APEC나루공원에 설치된 <형연>을 보면서 나는 첨성대를 재현한 <환생>처럼 참 멍청한 작품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화려하게 금분을 바른 박제된 유물이 여기 놓여 있구나. 작품을 보기 위해 부산으로 가기 전에 스피커에서 소리가 난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였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철골조를 스피커로 에워싸 복제한 종(鍾)이 공원 초입에 덩그러니 더욱이 멍청하게 매달려 있는 것을, 그것도 팔월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본다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담배꽁초의 고약한 냄새로부터 헤드라이트의 조명, 그리고 스피커를 이용한 소리를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끌어들였으나 시각적인 맥락에서는 기성의 화화와 문화재를 모방한 것에 불과했다. 물론 <환생>에서 버려진 사물에 생명을 부여하고, <형연>에서 개인적 기억을 소리로 풀어내고자 한 그의 의도는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패러디(parody)도 아니고 패스티쉬(pastiche)도 아닌, 남의 옷을 입혀 놓은 이 작품들이 의도한 것은 빛을 발산하는 구조물을 통해 잊어버린 과거, 즉 첨성대에 올라가 천문을 관측했던 신라 사람들의 우주에 대한 호기심과 과학정신에 대해 떠올리고, 밤하늘의 별을 헤던 어린 시절의 순수함으로 돌아가자는 순진한 발상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해야 할까. 성덕대왕신종을 모티브로 한 작품 역시 지금은 잃어버린 소리를 찾고자 했던 결과일까. 그렇게 하자면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측우기를 모티브로 물을 끌어들이고, 앙부일구(仰釜日晷)를 통해 햇빛을 끌어들이고, 혼천의(渾天儀)를 차용하여 기후(氣候)를 끌어들인들 ‘멋있는 물건’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그러나 <환생>과 <형연>은 그의 작업이 자기갱신을 위한 과정이자 <화해>에 이르기 위한 모색의 결과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형태의 단순차용에 대해 내가 부정적인 시각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헤드라이트, 스피커 등으로 재료를 확장하고, 냄새, 빛으로부터 소리를 도입하면서 이제는 형태가 아니라 소리 자체를 작품의 핵심요소로 활용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관객참여형 종합예술을 향하여

 

인간의 감각기관 중에서 외부의 세계로부터 전달되는 자극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청각일 것이다. 외부로 열려있는 귀는 24시간 내내 가청범위 내의 소리의 파장을 받아들인다. 한원석은 소리에 관심을 가지면서 형태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소리의 숲>에서 외부의 소음 때문에 그가 우려했던 대로 자신이 디자인한 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형태를 점점 단순화시키면서 소리가 중요해지는 <화해>에 이르게 되었다. 어두운 방에서 마치 절해고도에 유폐된 듯한 잠깐 동안의 동요만 거치면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이 작품을 명상적인 것으로 고양시킨다. 그가 의도했던 것은 진음실(眞音室)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음파의 재생이었다. 그것을 위해 그는 특수한 앰프도 제작하고, 작곡가-작곡가라기보다 사운드디자이너란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와 협업하기도 한다. <화해>에서 가운데를 잘라낸 종이파이프에 내장한 빛을 따라 내부로 들어갈 수 있듯 소리를 찾아 귀를 기울이는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다. 그는 그것을 관음(觀音)이라 표현한다. 그는 <화해> 이후 컨테이너의 내벽을 스피커로 채운 터널과도 같은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그의 계획을 들으면서 나는 만약 이 작품이 의도대로 성취될 경우 어둠의 터널과 소리가 사람을 유혹하는 매혹적인 작품이 될 것이란 기대를 할 수 있었다. 존 케이지(John Cage)는 일본 선불교와 주역(周易)의 영향을 받아 텅 빈 소리 즉 소음을 음악의 요소로 받아들인 <4분 33초>를 발표했지만 한원석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보다 소리를 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 것으로 믿는다. 그가 발표할 새로운 작업이 전자제어장치와 같은 과학기술을 동원한 상호작용형 멀티미디어 작품과는 다른 사색적이면서 존재를 해체하고 다시 존재를 깨닫게 만드는 내성적(內省的)인 관음의 세계가 되기를 바란다. 하우저(Arnold Hauser)가 말했던 것처럼 중세 고딕성당으로 들어가면 장미창과 벽의 창으로부터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스며드는 빛과 색,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어울린 복합 시청각 경험을 할 수 있다. 제대(祭臺) 위로 뚫린 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신자나 순례객을 십자고상으로 이끄는 ‘빛의 길’을 제공하기도 한다. 한원석의 작품에서 터널이 단순히 빛이 지나가거나 잠시 머무는 통로가 아니라, 마치 카메라의 원리가 작용하는 어두운 방(camera obscura)처럼 작은 구멍을 통해 스며든 빛이 내부의 스피커로 이루어진 벽면에 영상을 맺히게 하고, 소리가 그 영상을 초대하여 어우러지는 복합 시청각공간이자 침묵과 명상을 함께 경험하는 장소가 된다면 관음의 의미에 더 부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텅 빈 비움의 공간만이 명상을 유도하는 장치는 아닐 것이다. 빛의 길, 소리의 길을 따라 걸으며, 빛을 듣고 소리를 볼 수 있는 공간을 희망하는 것이 부질없는 환상은 아닐 것이다. 그는 나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상상하는 것을 모두 구현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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