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너-우리의 소리를 더한 합창, 개개인의 소리는 하나의 메아리가 되어 큰 실루엣을 만든다. 검은 종을 둘러싼 버려진 3,088개의 스피커는 15년이라는 켜켜이 쌓인 먼지를 극복하고 6,176번의 납땜을 거쳐 새롭게 태어난다. 블랙 실루엣 안에는 현명한 검은 색이 녹아내린다. 칠흙 같은 ‘玄(검을 현)’이 빛을 얻어 ‘炫(밝은 현)’이 되는 순간, 동음이의(同音異義)를 가진 블랙의 에너지는 다름과 같음을 머금고 헤어짐의 슬픔조차 희망과 축복의 에너지로 전환한다.
“오늘 이렇게 우리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당신의 앞길을 축복합니다 / 그동안 지나온 수많은 일들이 하나둘 눈앞을 스쳐가는데 / 때로는 기쁨에 때로는 슬픔에 울음과 웃음으로 지나온 날들 / 이제는 모두가 지나버린 일들 우리에겐 앞으로의 밝은 날들뿐 /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날 때에는 웃으며 서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 우리 함께 다짐하며 오늘의 영광을 당신께 이 노래로 드립니다.” - 전인권 <들국화-축복합니다>
‘현영(現影)’의 변주, ‘맑은 소리가 깊고 은은하게 퍼진다(현재의 그림자)’ 라는 뜻의 현영은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을 그대로 재현한 작품을 검은 실루엣으로 번안한 것이다. 높이 3.7m 폭 2.3m의 규모의 거대한 ‘황금빛 종’이 빛을 거두고 장엄한 감동과 은은한 깨달음을 전달한다. 이 설치작품은 고유의 기능을 상실한 채 버려진 가치에 재생의 삶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Depeysement)’을 연상시킨다. 작가가 시·공간의 낯섦(낯선 경험)을 통해 긍정적 생(生)의 변주를 끌어낸 까닭이다.
위로와 치유의 노래, 비우고 채우는 마음
금호 알베르의 첫 전시 이후 자극적인 인공조명이나 꾸밈을 최소화한 공간에 매료된 작가는 “마음을 비우고 본질로 들어갔을 때 진짜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눈도 마찬가지다. 어둠을 향했을 때 두려움이 앞서지만, 이내 익숙해지면서 그 안의 본질을 보게 된다. 너무 밝은 빛은 우리를 장님으로 만들지만, 어둠 안에선 실루엣조차 본질에 근접할 수 있다는 깨달음의 결과이다. ‘본질에 가까워지려는 진정성 있는 행위들’은 들국화의 노래 속에서 더욱 확고해진다. 스피커 안으로 들어간 관객, 관객과 하나 된 작품, 시대 정신과 하나 된 공감의 노래, ‘들국화의 축복합니다’는 이율배반 같은 우리네 삶을 상징한다. 공허해진 마음을 채우는 것은 결국 ‘개인의 욕망을 비워내는 따스한 마음’이다. 위로와 위안이 필요한 시기, 축복은 매일 만나는 사람보다 오랜 이별을 앞둔 ‘헤어짐의 자락’에서 더욱 간절하다. 드러나지 않는 우리 삶의 많은 아픔들은 결국 위로와 위안을 통해 치유된다.
한원석은 이를 “The silhouette 현영(現影), 지금 내 앞의 그림자”라고 칭한다. 의기소침해 솔직하지 못했던 지난날을 수많은 고민과 반성의 날들 속에서 되새기기 위함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엔 금종(형연), 은종(나래쇠북) 가운데 본래의 모습 그대로의 색을 가진 ‘현영-검은 종’을 선택했다. 거대한 스피커 역할을 하는 종의 안쪽에는 서로 다른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힘(전력)을 전달하는 45개의 앰프가 설치돼 있다. 각각의 앰프들이 서로 다른 음원을 재생하며, 이를 하나의 채널믹서가 컨트롤 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오디오 안으로 관객은 스피커 안으로 들어오는 구조이다. 쌍방향의 소통 속에서 공간은 스피커가 되고 작가가 직접 부른 ‘위로와 위안의 노래’는 축복이 되어 새로운 의미를 더한다.
극단(極端)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다.
이 전시는 ‘보고 듣는’ 단순한 소통행위를 진정성 있는 깨달음 속에서 되새기는 기회를 제공한다. 작가는 인간 심성에 내재해 있는 ‘빛과 그림자’를 주제로 선택했다. 한원석의 심연엔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1962)의 사유가 엿보인다. 인간존재의 무상함과 허약함에 대한 개탄, 바타유는 인류의 가장 어둡고 폭력적인 행동들, 도덕적인 경계를 초월하고 무시하는 위반(違反)적 행위들, 금기(禁忌)와 타부(taboo)를 파괴하는 대담한 시도를 감행했다. 죽음의 언저리에서 바라본 창작의 에너지는 가능과 불가능,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의 거룩함과 본질이 발견될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한원석은 정형(forme)을 비정형(informe)화 하는 설치작업들을 선보이는 것이 아닐까. 이전에 아무리 천재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할지라도, 인간적이며 솔직한 감성들 사이에서만 예술의 본질을 보여줄 수 있다는 깨달음은 ‘한원석을 다시 태어나게’ 만들었다. 작가는 영국 런던 생활을 통해 삶의 분기점을 내놓았다. 인생의 좌절감과 분노, 미안함과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내면의 희망을 놓지 않은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미를 스스로 결단해 왜 존재하는지를 결론내려야 한다. 실존은 휴머니즘이다. 작가는 이를 매개하기 위해 한순간이라도 더 치열하게 살아가고 사랑해야 한다고 노래한다.
“어둠 속에 빛이 있다. 빛이 공존하는 어둠은 새로움의 발견이다. 나는 전시를 ‘보고 듣는’ 모든 이들이 반짝이는 날들을 향해 씩씩하게 내딛기를 바란다. 나라는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빛나는 ‘현영(現影)’ 이기 때문이다.” - 작가 인터뷰 중에서